11월 10일 제가 어언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아 둔..씨네21이며
만화잡지들을 모조리 내다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셨었습니다..
사전에 전화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말입니다..
당연히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저는 여느 야수 부럽지 않게 미쳐 울며 날뛰었었죠..
조금 진정을 찾은 저에게 아버지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먼지 소복이 쌓인 그 놈들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소용이냐며..
합당한 이유를 3가지 대면 청계천을 다 뒤져서라도 다시 구해다주시겠다고 하더군요..
다시 구할 수 있을거라고 믿지도 않았지만..
먼지가 쌓였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는 돈 수억 보다도 귀하게 여겨질 것을
쓰레기로 치부해버리는 아버지의 발언에 일순 정신이 싸늘해지면서
조목조목 제게 그것이 소중하고 필요한 이유를 댔더니 아주 머쓱해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렇게 속속 따져 이유를 댈거라고 생각 못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1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지독한 상실 후유증에 시달리던 - 구체적인 증상 : 밤에 잠자리 누워 눈물흘리기, 집 근처 헌책방을 지날 때 꽂혀있는 낡은 씨네 21 뚫어지게 쳐다보며 의심하기, 쓰레기 모아 둔 곳에 놓여있는 책더미에 가슴 덜컥 내려앉기 등 - 저는 최근에서야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1997년 씨네 21을 우연히 원주 집에서 발견한 감격에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의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구사일생, 원주집에 기거한 관계로 살아남은 1997년 8월 5일자 113호 씨네 21입니다. 그 때 아버지께 말씀 드렸던 이유 중 하나가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이자 소중한 자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울컥하여 댔던 그 이유를 어제 이 녀석을 읽으며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답니다.
113호 씨네 21의 주요내용은 왕가위 영화 "해피투게더"의 수입금지처분과 이현세 "천국의 신화" 음란물 혐의 등입니다. 여기에 연말 "살인의 추억"으로 각종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송강호의 어린(?)시절 영화 <넘버 3> 개봉 소식 - 우와 피부 뽀사시..역시 젊다는 건 좋은 것이여-, 이제는 더 이상 씨네에서 찾을 수 없는 구보씨의 영화 읽기, 다케이코 이오누에의 신작으로 소개된 <버저비터> 그리고 그리고 제 1회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소식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죠. 마치 지금은 유명해진 어느 감독의 데뷔작을 본듯한 기분이라며 공감이 되려나?
더욱이 "해피투게더" 수입금지처분이나 "천국의 신화" 음란물 혐의 등은 바뀐 것이라고는 없다고 느껴졌던 2003년의 현재와 과거의 간극을 한층 벌려놓았습니다. 요즘은 연예인 누드가 한해의 이슈가 될 만큼 성에 대한 지나친 상품화 조차도 자본주의 범주안에서 용인되고 있는 때인데, 당시엔 색스러울 것도 없는 "해피투게더"를 동성애 영화라는 이유로 수입금지 시켰으니..변해도 많이 변했죠..
30이라는 의미심장한 숫자를 코 앞에 두게 된 이 시점에서 이런 추억과 기억은 일상을 촉촉히 적셔주는 단비 같습니다. 물론 이런 추억과 기억을 찬찬히 밟으며 나아가야 할 시점이 오겠지만..그 전까지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더라도 집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저의 작은 벗으로 삼을까 합니다. 언젠가 제가 시간의 끝을 놓아버릴 그 날까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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